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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마당 > 성지 > 여우목 교우촌
   
 
작성일 : 11-06-28 14:48
[안동교구] 여우목 교우촌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324  



새재와 연풍에 어린 복음의 발자취
새들도 쉬어 가며 넘는다는 문경 새재(鳥嶺).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 온천 지대를 지나 30여 리를 가면 만나는 곳이 충청도 연풍(延豊)이고, 이곳에서 다시 심하게 굽은 고개를 올라 조령, 조곡, 주흘 등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면 경상도 문경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 터널이 개통되면서 어렵게 새재를 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 교우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1790년대 후반, 교우들이 새재를 넘나들 무렵부터 한두 명의 교우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이내 교우촌을 일구고 포졸들에게 쫓기는 교우들을 받아들여다. 또 훗날 최양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경상도의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으며, 그것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으레 성벽 아래의 수구문(水口門)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문경 새재와 연풍은 복음의 연결 통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새재를 넘나들었고, 그 아래의 연풍 주막에 묵으면서 신자들을 색출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1866년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칼래 신부는 연풍 주막을 지나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제가 연풍 주막 앞을 막 지나치려고 할 때 포졸들이 의심을 품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서 뒤따라와 이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토마스가 심하게 시비를 걸자 포졸들이 모두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서 저의 전대가 떨어져 돈이 튀어나오자 포졸들은 저를 잊어 버리고 돈을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칼래 신부의 1866년 6월 10일자 서한 중에서).
 
연풍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이 바로 황석두(루가) 성인의 고향이요, 연풍 성지는 곧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부유한 평해 황씨 집안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노력해왔으나,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는 구름이 걷힌 하늘을 보는 듯한 기쁨에 넘쳐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더욱이 부친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2년 동안 벙어리 노릇까지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 생활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부친이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투기 행위를 하였고, 이로써 10년 동안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추방 같은 것이었다. 이 추방 기간 동안 그는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1858년에는 회장으로 임명되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요 제자가 되어 번역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8년 뒤 대박해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을 때 황석두도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끝까지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이미 순교할 원의가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서울로 압송된 뒤에도 신앙을 증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학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박해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물처럼 흐르는 그의 호교론에 관장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고,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결국 그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으며, 임금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포졸들은 선교사와 장주기와 함께 그를 옥에서 끌어내 닷새가 걸려서야 보령의 갈매못 형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그곳 백사장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당시 황석두의 나이는 54세였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에서 황석두의 시신은 가장 먼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0여 년이 지난 1968년에 황석두가 복자품에 오르면서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는 마침내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성지로 이장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9-131] 
 
 여우목 교우촌:문경시 중평동 (054-572-0531 문경성당)
갑자기 상주의 신앙 고백비에서부터 불던 바람은 진안리에서 거칠어졌다.
진안리의 칼바람을 맞고 차를 돌려 출발했다.
3시반 쯤
<동로> 가는 길로 계속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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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후미진 산골...
약 30분쯤 차를 달렸는데도 여우목은 커녕 아무 것도 없다.
길에 돌로된 표지석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기에 그걸 살피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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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가서 왼쪽에 <내고향 중평리>란 표지석이 커다랗게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표지석 가까이 가 보았다.
가장 아랫쪽에 잘 보이지도 않게 '여우목 1.5킬로미터' 더 가라고
씌어 있었다. 반가운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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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목 주막>, 아무도 없는 빈 주막에 가랑잎이 구르고 있었다.
왼쪽으로 약 300미터 쯤 걸었을까?
월악산 국립공원관리인이 써 둔 팻말이 입구에 붙어져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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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을 피해 살았던 옛 교우촌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사람 살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빠알간 감이 늦가을 찬 바람에도 하늘 높이 달려 영롱한 빛을 발하며
달랑달랑 달려 있었다.
숨어 살면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서로를 위한 따뜻한 정으로
서로를 감추며 더 큰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있던 것일까?
늙은 감나무, 모과나무..그리고 높이 달린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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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교구에서 최근에 사들인 300평으로 꾸며진 곳이다.
순교자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는 14처의 조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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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치보와 그 아들의 동그만 두 묘소.
순례자를 위한 자연 친화적인 화장실.
늙은 감나무 아래 정답게 놓여 있는 돌 의자들....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슬픈 신앙의 조상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쓸쓸한 가랑잎 깔린 호젓한 길과
주인 없이 붉고 맛있는 감을 매달고 섰는 늙은 감나무들과
아직도 이윤일 요한님, 하고 외치면 왜, 하고 대답할 것 같은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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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무리 없더래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웅얼웅얼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사르륵 사르륵 가랑잎이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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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으니 얼른 가 봐. 지금은 추우니까, 더 따뜻해지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나.
감나무 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나 나누시게
아픈 이야기도, 사는 이야기도. 그대 소망도 기도하면 다 들어주실 걸세
저기 저 하느님께서..."
우리는 다음 해를 기약하고 그 호젓한 교우촌을 나섰다.
여우의 울음인지 "꺼억꺼억" 짐승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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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목 성지는 103위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대구 관덕정, 대구대교구 제2의 주보 성인,
당시 여우목 공소회장)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충청도 홍주 태생의 요한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때 11월 18일 30명의 신자들과함께 체포되어 상주 감영으로,
다시 대구 감영으로, 1867년 1월 21일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 했다.
미리내 묘역에 있던 그는 120년 되던 1987년 1월 21일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옮겨 모셨다.
여우목은 부근에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부락이)가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한다.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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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목 성지는 소백산맥이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대미산 중턱에 잡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 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고 산지를 개간하며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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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이 충북 정원에서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때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우거해 살았다.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1839년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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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보 요셉(1791-1840)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이 있는 뒷산)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아들 서인순 시몬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경산 모개골에 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출처:안동교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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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속 : 안동교구
  • 전화 :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054) 571-0709
  • 위치 : 중부고속도로 음성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충주를 거쳐 3번 국도를 1시간 남짓 달리면 수안보에 도착한다. 수안보에서 같은 국도를 타고 문경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10분 간격으로 연풍 성지와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나온다. 서울에서 수안보까지 자가용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남부지방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김천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3번 국도를 타면 상주와 문경을 거쳐 문경새재와 연풍, 수안보에 차례대로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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