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Map 전체메뉴닫 기
본당소개 사목평의회 신앙생활 예비자교리 나눔마당 카페모임 정보마당
사목방침 사목평의회소개 성당일정 천주교 공지사항 카페홈 수원교구
본당소개 산하위원회 미사안내 입교안내 말씀나눔 카페만들기 언론
신부님 주보 교리반소개 자유갤러리 성지
사무실 강론 교리내용 행사갤러리 가톨릭포털
관할지역안내 교리상식 세례명/대부모 오늘의연도 선교
찾아오시는길 이달의말씀 교리상담및질문 열린상담 해외성당
이달성가 모집안내 투표 정기간행물
 
       
 
본당소개 사목평의회 신앙생활 예비자교리 나눔마당 카페모임 정보마당
 
나눔마당 > 말씀나눔 > 임진왜란과 명량해전
임진왜란과 명량해전
우재구
작성일 : 14-12-09 16:09  조회 : 21,880회 
임진왜란과 영화 “명량”해전(鳴梁海戰)
 
2014년 7월 30일 개봉된 김한민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 “명랑(鳴梁)”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700만이나 되는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임진왜란 7년(1592년 4월 13일--1598년 11월 26일) 해전 중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1597년 9월 16일 치러 진 명량해전이 왜 이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의 관심을 이끌었을 까?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나가 일본군을 맞아 싸우라는 왕명을 어겼다 하여 무군지죄 등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혹한 고초를 겪었다. 정유년 1월 조선을 재침하기에 앞서 임진년부터 시작한 조선 정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순신 장군 때문임을 분석한 도요도미히데요시는 재침에 앞서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계략을 세운다. 이 계략에 말려든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나가 일본군을 맞아 싸워 상육 자체를 막으라는 왕명을 내린다.
 
이순신 장군은 열배가 넘는 일본군을 부산에서 맞이하여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 이에 불응하자 무군지 죄 등으로 선조는 1597년 2월 27일 한산도 삼도수군통제령에서 이순신을 잡아 한양으로 호송한다. 한양에 와 27일 동안 참혹한 고초를 겪었다.
 
그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권준, 안위, 이영남, 송희영, 나대용, 정운 등 핵심 이순신의 장수들을 다 내친 체 선조의 명을 시행하라는 권율 도원수의 질책에 쫓겨 출전하고 만다. 거기에 더하여 일본 장수 와키자키 야스하루(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장수)의 계략에 빠져 다대포 해전에서 얻은 적은 승리에 흥분하여 부산까지 진격하려 했다. 김완 조방장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의 강력한 회향 건의 에도 불구하고 부산으로 진격하려 하다 적에게 완전 포위되어 1597년 7월 16일 칠천량(漆川粱) 해전에서 대패하고 만다. 조선 수군의 전멸이었다. 그간 이순신 장군이 준비 해 놓은 200척의 군선과 300문의 화포, 화약 4000톤(1톤은 266관), 군량미 9914석 그리고 수많은 병력을 다 잃었다. 본인도 육지로 도주하다 일본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사하고 만다.
 
칠천량 해전 참패로 뻔뻔스럽게도 선조는 1957년 8월 13일 충무공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다. 사태가 심각한 만큼 국왕으로써는 안쓰러울 정도로 자세를 크게 나추었다.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의 꾀가 두텁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 거니와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 내 구태여 무슨 말을 더 보테리오!.” 안쓰럽다 못해 선조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목이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16일 남은 군선 13척으로 133여 척의 일본 수군을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 즉 명량으로 유인하여 급한 물살과 간만의 차 및 좁은 지형 물을 이용,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완파 적선 31척, 반파 91척, 일본수군 전사자 18,466명을 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승승장구하여 남해안을 모두 장악한 일본 수군의 예기를 완전히 꺾기고 만다. 
 
모두 미끼지 않은 싸움이었다. 원균의 비합리적인 명령으로 흩어졌던 이순신의 예하 장수들 즉 권준, 이영남, 송희립, 이운용 등이 다시 집결하여 이순신과 함께 싸웠다. 생사를 초월한 필사의 전투였다. 그리고 “하늘이 도운”싸움이었다. 한 민족의 투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준 전투였기에 지금에 와서도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아닐 까?
 
한편 전란이 일어난 후 조선과 명, 명과 일본 간의 관계는 어떻게 돌아 갔는 가? 임진왜란 다음 해 1593년 11월 명(明)의 사신 사헌(司憲)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선조에게 전할 때 그 칙서에는 조선을 2, 3개 지역으로 나누는 분할역치(分割易置)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같은 해 12월 7일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의 심복인 나이도 조안(內藤如安)이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明과 倭의 협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오가는 길에서 세월을 다 보내다가 1596년 9월 2일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한 명나라의 책봉사 심유경(沈惟敬)이 명 황제의 칙서를 히데요시 앞에 내어 놓는다. 그 칙서에는 “너를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 운운하는 구절 이외에 그가 주창한 “강화 7조약“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송복 교수의 유성용과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에 따르면 강화7조약은 다음과 같다.
1) 대명의 황제의 현숙한 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는다.
2) 감합무역을 복구하며 관선과 상선의 왕래가 있어야 한다.
3, 대명과 일본은의 대신들이 화의를 위해 서로 서약서를 교환한다
4)조선의 반대를 돌보지 않고 조선 8도를 나누고 그 중 4도와 수도는 조선국왕에 돌려준다.
5)4도를 돌려 주기로 했으나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이 인질로 와야한다.
6)지난해 선봉대가 생포한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 보낸다.
7)조선의 대신이 영원히 우리를 배반하지 않은 다는 서약문을 쓴다.
 
히데요시는 그의 요구조건이 완전히 무시 된 것을 알고 명과 왜가 벌여온 4년간의 교섭(1592년 9월1일 ~~1596년 9월 2일)을 끝내고 결렬을 선언한다. 그 결과 정유년 재침이 강행된다.
 
그 후 명은 다시 사신 사헌(司憲)을 선조에게 보내 국가경영의 실책을 힐난 하면서 선조의 양위를 강력이 요구 하였다.
 전쟁을 총 지휘해 오던 서애 유성용(西厓, 柳成龍) 대감의 독립자강(獨立自彊)의 일념과 유능제강(柔能制强)의 외교력으로 사헌을 설득하여 전쟁 중에 양위하는 치욕을 면하게 하였다. 명. 왜 간의 협상 결렬로 졍유재란이 일어나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 온 다음 명랑해전에서 패하고 조, 명 연합군의 수륙 양면공격으로 전세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며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쟁 발발 7년 만에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가슴에 사무친 치욕과 온 백성들의 처참한 전쟁 참상을 격고서도 그 쓰라림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와신상담과 올바른 구국의 정책을 펴지 못한 체 조선 조정은 그 후 300년 동안 의명파(依明派)가 자강파(自彊派)를 누르고 오직 중국에 의존 하여 나라를 지키고 다스린다는 사대주의 당파가 권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왔다. 즉 임진왜란의 쓰라린 치욕을 잊어버리고 “나라가 나라가 아닌”(其國非其國)상태로 정치는 이어져 왔다.
 
드디어 311년이 지난 1910년에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기는 치욕을 맞았다. 이런 치욕의 역사에 대한 울분과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기를 바라는 우리 민초들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명랑” 영화의 대박을 가져 온 것이 아닌가?
 
영화 명랑이 큰 인기를 끌자 KBS는 10년 전에 방영했던 “불멸의 이순신”을 다시 방영했다. 밤 11시 40분부터 한 시간이었다. 초 저녁 잠이 많은 저는 당일은 못보고 다음 날 KT가 운영하는 COOK방송에 들어 가 오후 여유 있는 시간에 조용히, 그리고 곰곰이 감상할 수 있었다. 10년 전 방영한 프로라 새롭게 보는 듯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1여 년 전에 서애 유성용 대감의 천거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고 또 육군에서 수군 전라좌수영 통재사로 발탁 된 이순신 장군은 폐허 같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였다. 부조리와 부패를 없애면서 훈련 되지 않은 장수와 병졸 들을 인계받아 새로 집을 짓듯 장수들의 마음을 얻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선을 건조하고 무기를 제작하며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해 나갔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휘하 장수들의 책임 분담과 군령의 확립, 실전 같은 엄한 훈련으로 수군의 기강을 세우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 死”)의 신념아래 23전 23승의 기적을 이룬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권준(權俊), 이는 안동이 본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순천 부사로 있다가 이순신 장군과 손을 잡았다. 5관5포 휘하 10명중 유일한 문관이었다. 권율 장군과 같은 문중의 친척(13촌)으로 동서간이기도 했다. 전라좌수영에서 좌수사 다음가는 서열 2위(중위장)가는 장수였다.
 
안위(安衛), 전북 김제 벽산면 출신. 1592년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 제2차 당진포 해전에서 전위장으로 싸움었다. 임진, 정유재란 시 모두 이순신 장군휘하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종전 후 1598년 정월에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었다. 노량해전의 선봉장으로 싸웠다.
 
어영담(魚泳潭), 함안에 살던 어영담은 1532년 생으로 광양현감으로 있었다. 남해안 물길을 훤히 알고 있는 분으로 노장인데도 불구하고 2차 당항포 해전에서 31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나가 싸워 큰 공을 새웠다. 불행하게도 한산 통제영에서 전염병으로 1594년에 병사하셨다.
 
나대용(羅大用),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거북선 제작가로 유명했다. 백병전에 등한 일본 수군이 우리 전함에 승선 할 수 없게 하는 방안을 고민하던 그는 고슴도치 모형의 배 즉 2층 구조인 팔옥선을 한층 더 올려 그 위에 철갑과 송곳 모양의 철 못을 씌워 아예 왜적이 도선을 못하게 하여 돌격 선으로 활용하는 거북선 즉 구선(龜船)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를 처음 듣는 사람은 다 반대 했으나 이순신 장군만은 그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높이 사 믿고 추진시켜 거북선 제작에 성공하였다.
 
어언량(李彦良),영덕군 출신으로 영덕 이 씨의 시조다. 거북선 돌격 대장으로 매우 용맹했었다. 노량 해전에서 백병전을 벌리다가 부상을 입자 왜놈 손에 죽을 수 없다 하여 바다로 뛰어 내려 죽었다.
 
정 운(鄭運), 1543년 전남 영암에서 탄생, 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옥포해전 부터 노량진과] 당포(唐浦)· 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
송여종(宋汝悰), 정운의 뒤를 이어 논도 만호가 된 인물이다. 정유 재란 때 공을 세웠다. 순천시 낙안(樂安)군수로 신호의 막료 였으며 한산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다.
 
송희립(宋希立), 1553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다. 이순신이 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전사할 때 까지 그와 함께 한 충복이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죽자 죽은 사실을 알리지 않고 전투를 끝까지 지휘한 장수였다.
 
이운룡(李雲龍), 한산대첩때 유인책을 제시하여 학익진을 성공적으로 펼치게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옥포만호를 맡고 있었고 그 옥포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싸웠다. 후에 7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영남(李英男, 1563년 ~ 1598년)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에는 경상우수군의 군관에 있었고,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이루게 한 공로자다. 전라우수영에 있으면서 원균의 부당한 요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이순신의 지도력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장수였다. 이순신이 조정으로 압송되기 전 그가 지였던 지과(止戈)라는 글씨가 색여진 칼을 건내 주었다. 이순신장군의 심복이였다. 가리포 첨절제사로 제수되었고, 이순신과 같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산정면에 있으며 가리포첨사로 노량해전에 참여했고 고금도 충무사에는 이순신과 함께 모셔져 있다.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중화산동 예수병원 근처에 그를 모시는 절이 있다.
 
우치적(禹致績),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거제도의 만호(萬戶)로서 원균(元均)의 휘하에 들어가 남해현(南海縣) 앞바다에서 왜적을 방어했다.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거쳐 1596년 순천 부사(順川府使)가 되고 정유재란 이후 이순신 진영에 합세하여 1598년 노량(露梁)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619년(광해군11)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25년(인조 3)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거쳐, 1628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재임 중 죽었다.
 
이 이외도 김응함, 김수철 김완, 배홍립 등 전공을 세운 장수 들이 많았다. 병사들 가운데서도 정유재란 때 원균이 1957년 7월 16일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다라를 다처 절단 수술을 한 병사가 앉은뱅이가 된 후에서 총포 화약 전문가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화약 장전을 지휘하는 눈물겨운 투혼을 보이였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부산진성을 필두로 다대포성,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한 일본군 16만 명(조선군은 8천명)은 고니시유키나(小西行長)가 선봉에 서서 20일 만에 한양도성을 점령하였다. 일본 수군은 육전의 방어 태세로 보아 조선 수군도 육군과 동일 할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남해안 각 항구에 분산 배치되어 육지에 상륙하여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노략질 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 동태를 첩자를 통해 면밀하게 파악한 이순신 장군은 그해 5월 7일 옥포에 주둔하고 있는 30여척의 도도다가도라의 함대를 공격했다. 임진왜란 첫 해전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 수군은 백병전 채비를 하고 이순신 함대를 맞이하였으나 총통으로 무장된 우리 수군에 대패하고 만다. 30여척의 일본 수군은 괴멸되고 도도다가도라는 허둥지둥 육지로 도망가고 말았다.
 
임진왜란 첫 해전이었기에 이순신 장군과 수하 장수들은 자만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니 병사들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찔렀다. 평양 북쪽으로 몽진 가 있는 선조에게 전쟁발발 후 처음 승전보가 전해지니 선조도 크게 기뻐하였다. 이순신에게 가선대부 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사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국의 장정들은 전라 좌수영으로 몰려 와 자원입대하여 싸우기를 청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은 더욱 분발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국민들이 총 궐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절라 좌수영은 전라도에 위치한 만큼 현지 주민들의 부역과 희생이 또한 컸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약무호남, 무유조선(若無湖南, 無有朝鮮)”이라고 쓸 정도로 전라도를 지킨 이순신의 공적이 위대하며 곡창으로서의 전라도와 그 주민은 조선의 수호신이었다.
 
즉 병사들을 모집하고 군선을 건조하는 자재와 목공들의 노역을 얻어내며 무기와 화약 제조의 공장들, 군량미 조달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는 전라도와 전라도민들의 헌신적인 지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애 유성용 대감이 아산 출신의 이순신을 크게 발탁한 것은 출중한 인품 하나만 보고 한 인사였다. 이순신 장군도 위에서 보듯 기용한 장수를 출신지와는 무관하게 무장으로서의 자질과 경험, 애국애족의 충정만 있으면 능력에 따라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한 용병이었다.
 
그러기에 모두 목숨을 걸고 이순신 장군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겠는 가? 이순신 장군이 왕명을 어긴 죄로 한양으로 호송되고 그 후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자 바다 물길을 잘 아는 장수 조방장만 남긴 체 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들이 모두 병영을 떠났다. 이것을 보면 최고사령관의 지도력과 인품, 덕목과 지략이 조직이나 군대를 강하게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느끼게 했다.
 
이런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그래도 일본에게 서해로 가는 뱃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동시에 전라도를 지키고 나라를 지켰다. 역사가들은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하였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전라 도민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라고 썼다. 서애 유성용 대감, 이순신과 전라도민이 없었으면 그때 조선은 반 토막이 났을 수도 있었다. 히데요시의 강화 7조약대로 한수이남 4개도가 일본치하에서 300년이 흘렀었다면 한민족의 정체성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 아닌 가? 끝
 
 

   

 
동천성바오로성당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수집거부 홈페이지 이용문의
천주교안내 성당사무실 성당일정 카페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