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 ‘사랑하다’와 ‘살다’는 결국 같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어에서도 ‘살다(live)’와 ‘사랑하다(love)’는 철자 하나 차이일 뿐.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사랑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몰라.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장미, 괴테, 모차르트, 커피를 사랑하고…. 우리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끝없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기 일쑤지만, 살아가는 일에서 사랑하는 일을 뺀다면 삶은 허망한 그림자가 아닐까.”
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그의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이종욱 서강대 총장과 장 교수의 오빠와 여동생이 ‘장영희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을 만났다.
“영희 말대로 쓰러지는 게 실패가 아니라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게 실패야.” 장 교수의 가족들은 학생들을 격려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장 교수님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겠다.”고 학생들은 다짐했다.
장영희 교수는 1952년 9월 서울에서 영문학자인 장왕록(張旺祿)박사의 딸로 태어났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으나 역경을 딛고 서울사대 부설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하여 1985년 뉴욕주립대 올버니(Albany)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해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고, 번역가와 수필가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암과 싸우다가 57세의 나이에 주님의 품으로 갔다.
목발에 의지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는 장애와 세 차례의 암투병 속에서도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수필과 일간지의 칼럼 등을 통하여 따뜻한 글로 희망을 전하였다.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을 펴냈고, 펄 벅의 <살아있는 갈대>등을 번역하였으며,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선생님, 꿈속에서도 목발을 짚으세요?”
장영희 마리아 교수는 평소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고, 짓궂은 농담도 가볍게 받아넘겼다. 투병 중에는 “제자들이 시신을 운구해줬으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동생 영림 씨(52)는 “언니가 평소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정형편 때문에 못하는 학생이 제일 안타깝다고 했다. 이공계는 장학금이 많은데, 인문계는 별로 없어서 장학금을 꼭 마련해주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딸을 보내고 어머니 이길자 씨(85)는 자녀를 모두 모아놓고 ‘영희의 인세통장’을 내밀며 말했다. “이걸로 서강대에 장학기금을 마련해주자. 그게 영희 뜻인 것 같다.” 어머니 이름으로 만든 통장에는 장 교수가 세상을 떠난 날 출간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인세가 들어 있었다. 가족은 여기에 퇴직금과 조의금을 더해 장 교수가 세상을 떠나던 해 2009년 9월 3억5000만 원을 서강대에 전달했다.
점수가 나쁜 학생들의 시험지에다가 ‘꼭 내게 와서 면담할 것!(You've got to come and see me!)’이라고 쓰다가 불현듯 “아, 이 말을 내 유언으로 쓰면 어떨까. 아니면 퇴근할 때 조교들에게 하는 말, 즉 ‘수고해라. 나는 간다.’라고 할까?” 역시 장 교수가 수필에서 쓴 말이다. 그리고 금방 다녀오겠다며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장 교수가 제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공간도 생겼다. 영문학과 강의를 가장 많이 한 정하상관 315호를 서강대는 이날 ‘장영희 강의실’로 지정했다. 작고한 교수 이름으로 강의실 이름을 지은 건 이 학교에서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