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5월, 서슬이 퍼런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니콜라이는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발트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경주에 들러 역사유물 몇 점을 챙기고는 매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규슈 사가(滋賀)현 오쓰(大津)항에 내린다. 권위의 상징인 백말을 마다하고 인력거에 올랐다. 일본의 문무 대신들은 조아렸다.
그때 돌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오쓰 항에서 경비를 맡고 있던 일본의 하급순사 쓰다 산조(津田三藏)가 니콜라이의 목을 겨눠 칼을 휘두른 것이다. 운 좋게도 니콜라이 황태자는 머리에 9cm 정도의 상처를 입은 채 몸을 피했고, 그를 쫓아가던 산조는 황태자의 다른 러시아 일행과 인력거꾼들에 의해 붙잡혔다. 이때 피습을 당한 황태자가 후에 러시아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가 러시아혁명으로 물러나 사형을 당한 니콜라이2세다.
쓰다 산조는 러시아황태자를 공격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당시 일본이 러시아와 북방영토 문제로 마찰이 있었고,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자 극동지역에 세력을 펼칠까 두려워 러시아에 대한 일본사회의 반감 때문이라는 거였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물들었던 쓰다 산조는 자신이 일본을 위해서 러시아 황태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거였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의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해군 함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이었다. 나가사키를 거쳐 사건 당시에는 교토로 향하고 있었으며 요코하마와 도쿄를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변을 당한 것이다.
일본사회는 정부와 민간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러시아에 대한 사죄에 총동원되었다. ‘1천만인 진사(陳謝)편지 보내기운동’ 등 한마디로 러시아에 납작 엎드려 빌고 또 빌어대는 형국이다. 일본의 모든 학교는 즉각 휴교를 했고, 신사와 절에서도 러시아 황태자를 위한 철야 기도회가 열렸다. 황태자 앞으로 보낸 문안전보가 1만 통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유코(畠山勇子)라는 한 젊은 여성은 고향을 떠나 교토로 와서 러시아황태자에게 사죄를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살에 대하여 일본의 모든 언론과 정부, 학계 등 각계각층에선 한목소리로 찬양하며 다른 이들도 동조자살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했다.
신(神)처럼 추앙받던 메이지(明治) 일본왕도 이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바로 사건 다음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저녁에 교토로 달려갔다. 니콜라이가 머물고 있던 토키와 호텔에서 황태자를 문병한다. 메이지 왕은 세 명의 친왕과 함께 니콜라이를 고베까지 배웅했으며, 고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에까지 찾아갔다.
오쓰 항 사건의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으나 또 다른 논쟁거리를 낳았다. 당시 일본은 ‘덴노(天皇)나 황족에게 위해를 입힌 범죄’를 대역죄로 규정하여 사형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황족에게는 적용할 수는 없었다. 니콜라이가 사망했다면 사형이 가능하나 부상만 입은 상황이라서 사형선고는 불가능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눈치를 살펴 쓰다 산조를 사형에 처하고 싶었지만 대심원 원장 고지마(兒島惟謙)가 반발하였다. 쓰다를 사형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와도 고지마는 근대적으로 독립된 사법 체계를 열망했고, 만약 서구열강이 일본의 법제도의 미숙함을 트집 잡아 불평등 조약을 계속 강요한다면 끝내 서양의 외세를 떨쳐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쓰다는 사건 발생 16일 만에 살인미수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죄의 정도가 지나치다”고 울분한 일본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타도 러시아’움직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