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감옥시절의 이야기
7개월 동안 나는 10kg(20파운드)쯤 무게가 나가는 나무로 만든 목걸이(칼 : 수판)를 목에 달고 두손은 수갑에 채우고 발은 형틀(차꼬)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른 죄수들은 몰래 감옥으로 들여온 조간신문에서 밤중에 내가 사형되었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준 일이 몇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친은 나의 죽은 몸을 매장하겠다고 찾으러 오시곤 하셨다.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수가 나와 같은 형틀에 얽매여 있었다. 어느날 아침 간수와 사형집행리와 순검이 갑자기 감옥문을 열고 우리방으로 뛰어들어왔다. 방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형집행리에게 넘겨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형틀을 열고는 살인수를 끌어내고 나는 다시 형틀에 잠가버렸다. 나는 "이 다음은 나로구나"하고 독백하면서 오히려 내가 먼저 끌려가서 빨리 끝이 나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서 수갑과 형틀이 벗겨지자 삶에 대한 욕망이 나에게 서서히 떠올라왔다. 내가 그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감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7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어떤 이들은 사형장에게 끌려가면서 마치 내가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듯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쳐주는 것이었다. 무거운 칼 소리가 들려올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장호익장군도 우리 감방 바로 뒤에서 단수단했다. 그는 세번째 칼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하여 만세를 불렀다. 나는 요새도 꿈속에서 감옥시절의 이런 저런 일을 보곤 한다.
여기에 적은 것은 나의 거센 생애의 극히 적은 측면에 불과하다.[그러나 이 일들을 통해서오] 이 세상 딴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나라와 개인의 자유를 위해 고초를 당하고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도 한없이 심하게 고초를 당한 많은 고상한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거나 외국 통치자들의 보도통제를 당하여 말을 못하고 있는데 나는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자유의 땅인 미국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의 동포들과나의 창조주에게 나의 나라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자유를 위한 투쟁에 관한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할 의무를 갖고 있다. 한반도 전체는 거의 감옥과 같은 상태에 있으며 전한국민족은 죄수취급을 당하고 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국민족당은 잠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 일 중의 한 가지는 나를 석방해주는 일이었다. 내가 서울감옥의 문 밖으로 첫걸음을 딛고 나왔을 때 한국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소멸되었고 승전한 일본군은 한국의 목을 쥐고 급속히 힘을 더하고 있었다. 일본은 온 세상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선포하여 서방국가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은 한국을 그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자 그들이 보호한다고 하던 그 생명 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독립당은 그들이 일본에게 배반당한 것을 갑작스럽게 인식하고 나를 특사로 미국과 유럽에 보내 그 나라들의 원조를 구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모든 길을 막아버렸고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버렸다.
사실 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투옥될 지경에 처해버렸다.
1904년 11월 초에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 조용히 조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민가는 한국이민들과 함께 배의 3등실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일본인들은 내가 민병환과 한[규설]장군으로부터의 중요한 외교문서 여러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이 일은 그 자체가 긴 얘기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기술해 보려고 한다]
(역주 ㅡ 이곳의 마지막 문장은 원봉에 줄이 그어져 있다.)
[역자의 말]
(우남은 위에서 자기의 유년, 소년 및 청년시절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이 시절에 관한 글이 또 하나 있다. 즉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단 귀국하였던 그는 1912년에 감리교국제회의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고국을 떠났는데, 그가 미국의 시애틀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신문기자의 청탁을 받고 자기에 관한 글을 하나 써준 것이 있었다. 이 글의 내용은 그 후에 장편으로 써놓은 글과 중복되는 곳이 많이 있기는 하나 세부에 있어서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1912년에 썼던 이 글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유가에서 태어난 나는 중국고전과 역사, 문화, 종교 등에 관한 책들을 습득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을 나의 의무로 여겼고, 유교만큼 훌륭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또 나를 생일 때마다 서울 근처에 있는 큰 절인 '되무가이'(?)[되무개(?)]에 보내어 장수다복을 빌도록 하곤 하였었다. 유교가 윤리나 정치적 원리를 다루는데 비해 불교는 많이 달랐고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이처럼 암흑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동안 조선 땅에는 새 시대의 동이 트고 있었다. 외국공관들이 세워지고 외국어학교들이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선교사들이 서울 장안에서 예수를 찬미하고 그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는 것르 볼 수 있었다. 유교학교[서당]를 떠나 '새것'을 배우러 간 친구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때때로 놀러와서 전보, 철도, 비행기 등등 서양에서 발명된 기괴한 것들에 대해 배우라고 역설했지만 나는 "그들이 천지를 개변해도 나는 어머니의 종교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축하곤 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양의 구세계는 현대문명의 광범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낡아 빠지고 많이 악용되어오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 그런데 진보당정권은 여러가지 학교르 ㄹ세우고 관비로 운영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를 배우고 서양문며을 배우도록 온갖 장려를 하고 설득을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던 끝에 배재학당에 가서 영어를 배우기로 작정하였지만 며칠간 나의 작정한 바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하에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에 나가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학교에 갔더니 노블(Noble)씨가 아침예배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나생 처음으로 말을 건넨 외국사람이었다. 이익재에게 물어보니 학생들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서 나도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우리들에게 무언가 먹고 마시게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박장대소하고는 그럴 위험은 없다고 일러주었다.
예배실에서 나는 뒷줄에 않아서 그 반에 있는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키가 큼 아펜젤러씨가 강단에 서서 청중에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역주 ㅡ 여기에 우남이 쓴 표현으로는 아펜젤러씨의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그 내용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