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응답
정 필 수 (토마스 아키나스)
고기구역 거주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간절한 우리의 기도는 과연 이루어지는 것 일가? 기도를 하면서 가끔 이러한 막연한 의문을 가져본다. 이러한 의문에 다시는 들지 않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간절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고 믿게 된 나의 경험을 얘기하고자 한다.
1985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이주일간 멕시코에서 휴가를 보낸 우리 가족은 신년을 어스틴에서 맞기 위해 귀환 길의 페달을 서둘러 밟고 있었다. 엘파소 국경이 가까워 오면서 년말을 보내는 자유무역지대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도 차창으로 흘려보내며 근무시간 내에 미국 입국을 마치려고 서둘러 오다 보니 차의 가소린 계기도 거의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고, 보유 현금도 백페소 짜리 1장과 동전 몇닢 뿐이었으나 국경만 넘으면 어스틴도 멀지 않고 신용카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에 안심하며 차를 몰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려는 차량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학생으로서 신분이 확실했던 나는 서류 심사대에 이를 때까지 차례를 기다리며 잠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여권을 제시했더니 이민국 직원이 문제가 있다며 열외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차분히 설명을 해나갔다. 즉 그 해 9월부터 유학생은 비자기간이 지나도 갱신할 필요가 없으며 공부가 끝날 때까지(D/S) 계속 합법적인 지위를 유지한다는 관련규정의 개정이 있었다는 해설을 이미 듣고 있었기에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민국 직원은 자기는 그러한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신규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이민국 직원과의 전화통화만으로도 이러한 규정의 적용여부는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 재차 확인해 볼 것을 요청했으나 연말의 늦은 시간이라 통화가 불가능했다. 결국 다음 날 영사관에서 입국비자를 받아 다시 들어오라는 차가운 선언만 들은 채 국경의 혼잡한 대열을 뒤로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민국 직원이 단순한 규정의 개정도 모른 채 근무를 하다니 이런 엉터리 관리가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지만 아류 불법입국자로 몰린 당장은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다음날은 신정이고 2일도 공휴일이어서 1월 3일 월요일에나 영사관이 문을 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수중에 현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맨 먼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러 왔다. 가스가 거의 바닥에 달해 몇 마일밖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어린아이들도 서서히 배가 고프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이거야말로 사면초가요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진 패장의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동원할 무기라고는 세치 혀로 할 수 있는 스페인어 밖에 없으니 멕시코 사람에게 사정을 잘 설명하여 이 난국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멕시코 자유무역지대의 사정을 알고 있지만, 주로 변두리 모텔을 찾아다니며 한국 유학생의 절박한 사정을 말하고 신용카드를 받든지 아니면 정말 신용거래를 하든지 간에 이틀 동안 유숙시켜 줄 것과 식사 및 가스주입을 위한 현금을 차용하려는 외교를 벌리기 시작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세 번째 모텔에서 3일간 유숙한 것으로 신용카드를 긋고 약간의 현금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천금같은 돈을 아껴 가며 간단한 요기를 한 후에 잠을 청했지만 정식 비자를 받으려면 필요한 서류를 학교에서 다시 발급 받아야 하고 누군가 들고 와서 나에게 건네주어야 하는데 며칠이나 걸릴지, 만약 비자가 거절당하면 다시 멕시코시티로 들어가는 비자도 이미 무효화되어 자유무역지대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데 어찌하나 등 불길한 추측들이 난무하여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지구는 정확하게 돌아 밝은 새날을 열어 주고 있었다. 1986년의 첫날이 밝았지만 이렇게 무망의 신년을 맞기는 처음이었다. 앞으로의 이틀,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막막한 설날 아침이었다. 결국 모래 같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치우고 나서 삭막한 국경도시의 성당을 찾아갔다.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을 뿐더러 움직일 가스도 충분치 못하니 행동반경이 대폭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천주교가 국교인 나라라서 동네마다 명동성당만큼 큰 성당들이 있어 가까운 성당의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전년의 교무금 헌금 실적을 분석하며 금년에는 많은 헌금을 강요하는 신부님의 강론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주님께 무작정 도와주시라고 기도를 드렸다. 사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지만 그 때처럼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주님, 저희를 이 아무 연고도 없고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미국도 아니고 멕시코도 아닌 제 3국의 땅에 버리지 마시고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저에게 길을 열어 주소서, 주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소서. 스페인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우리말 기도지만 우리 가족의 기도는 간절했다. 성당 안은 미사가 끝나서 신자들이 다 돌아갔으나 우리 가족의 끝없는 기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마치 할 일을 이제야 찾은 듯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도만을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쳐서 힘없는 발길을 숙소로 돌리느라 큰길로 나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리며 고함을 치는 사람이 있어 흠칫 놀라며 차를 멈췄다. 아마 내차가 차선을 넘으며 위험을 야기한 모양이었다. 내차를 지나쳐 한참을 진행하다 정지한 운전자가 얼굴을 내밀고 욕설을 퍼부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한 맘으로 사과를 하려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 이게 누구란 말인가. 지난해에 나에게 수학을 개인 교습 받던 멕시코 친구인 일년 후배가 아닌가? 그도 비로소 나를 알아보고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닦아 오며 웬일이냐고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본 그의 모습은 바로 내가 그리던 주님의 얼굴과 너무 닮아 있었다. 평소에는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아 개인적인 사정은 모르고 있었으나 그가 자유무역지대인지 어딘지 국경에서 가까운 곳 출신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더니 정말이지 우연치고는 너무 엉뚱하게 이 오지에서 그를 만나게되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무역업으로 성공한 기업인의 아들로 미국 영사관을 비롯하여 작은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즉각 그의 제의에 따라 그의 집에서 점심도 먹고 편히 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고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자를 문제없이 발급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을 듣고 나서였다. 그러고 보니 마치 지옥에서 구원천사를 만난 듯한 이 반가움은 바로 전까지 올렸던 기도의 응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체류기간 동안 최대의 친절을 베풀어 우리를 돌보아 주었고 월요일에는 아침 일찍 영사관을 찾아가 비자를 받도록 도와 주어 우리는 무사히 어스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단순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주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시며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신다고 믿게 되었다.